인형사 The Doll Master, 2004 - 정용기 2000년대 공포영화



어릴적 나의 침대 곁을 지켜주던 인형들이 있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의 생김새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소꿉놀이를 하거나 껴안고 자며 혼자 집에 있던 외로운 시간들을 함께 했으니까. 그러나 교복 입을 나이가 되고부터는 인형들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고, 이들은 언제나 똑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하나의 사물에 불과했다. 인형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말을 걸고 하나의 존재로 인정했던 나는 완전히 무심하게 변해버렸다.

영화에서 해미가 말한다. "무책임한 인간 탓일까요, 제멋대로 사랑을 느낀 인형탓일까요." 이 대사를 한 번 더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엔딩 장면이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한다. 내 모든 것인양 애착을 가'졌'던 '무엇'을 그렇게 가차없이 내버리는건, 어쩌면 너무 간단한 일이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생령이 깃들어 인간화(?) 된 미나는  '처음부터 넌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해미의 말을 듣고 잠시 폭주하지만 결국 자신을 구하려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해미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미나는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해미에게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고, 해미는 공포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머리라도 한번만 쓰다듬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해미와 미나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인형사>는 먹먹하고 씁쓸한 정서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공포 영화에 공포가 없다는게 치명적 단점이다. 물론 외딴 건물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이따금씩 구체관절인형들이 깜짝 놀래키긴 하나, 그뿐이다. 개인적으론 구체관절인형이 공포영화에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연출의 문제일지도), 솔직히 애나벨이나 처키랑 맞짱뜨면 끽 소리도 못할 것 같다. 마지막에 성인 크기의 인형들이 살아나서 삐그덕 거리며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장면도 임팩트가 없다. 꼬마 크기의 처키가 칼들고 달려오는 게 더 무서울듯.

그리고 시나리오상의 허술함 또한 지울 수가 없다. 자신을 만든 남자를 사랑했던 인형이 남자를 죽게 만든 다섯 명의 사람들의 후손들을 죽인다는 설정이 가장 아쉽다. 하다하다 연좌죄라니. 의도적으로 초대된 다섯 명(엄밀히 말하면 잠입 형사 빼고 네 명)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엮여있는게 이 지역 출신뿐이어서 이들 사이의 깊이 있는 관계 설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할아버지의 죄말고는 사연이 없으니 뭐. 게다가 '생령'이라는 설정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인형에 영혼이 깃들면 인형이 살아나야 하는 거 아닌가...? 임은경(미나 역)이 인형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공포감이 뚝 떨어졌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인형이 살아움직인다는 점이 인형을 이용한 공포영화에서 중요한 포인트인데. 암만 생각해도 빨간색 써클렌즈에, 다크서클 분장은 아니잖아요.

<인형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소리는 "이 좋은 소재를 두고!"일 것이다. 슬픈 공포? 좋다. 인형에 영혼이 깃드는 설정? 좋다. 이제 한국 공포 영화에 없으면 허전할 것 같은 원한에 의한 복수? 좋다. 그런데 이게 최선이었을까 싶다. 역시 <장화, 홍련>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일까.... 슬픈 드라마를 뺐으면 더 좋았을 <인형사>. 다시 인형을 소재로한 한국 공포영화를 보고싶다. 

덧글

  • CINEKOON 2018/10/09 13:22 # 답글

    아니 무슨 을사오적도 아니고...
  • 2018/10/10 20:4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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