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고보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처음이다. 그가 쓴 장편 소설은 두께부터 엄청나서 왠지 손이 쉽게 가지 않았고, 오히려 영화로 더 많이 접했다.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히가시노 게이고는 정말 엄청난 속도로 책을 내는데, 공장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식의 스피드가 나올 수 있나 싶다. 아무튼...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90년대에 나온 초기작들을 엮은 단편집이라는데, 처음 접하는 게이고의 책으론 잘못 선택한 듯하다. 차라리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장편을 먼저 읽을 걸 그랬나... 치밀하다는 느낌 보다는 작가가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더 눈길이 갔다.
'연민'이 느껴진달까. 모든 사건이 그렇다기 보다는 대부분, 조금씩 저들마다의 사정이 있어 안쓰러운 부분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춤추는 아이>와 <끝없는 밤> 그리고 <하얀 흉기>이다.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읽고나서의 뒷맛이 있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나머지 단편들 중에서 가장 치밀하기 때문에 표제작으로 선정될 만하다.)
<춤추는 아이>는 사실 읽고나면 마음이 찝찝해진다. 남학생의 순수한 선의가 결국 자신이 좋아하던 여학생을 죽음으로 내몬 악의가 되어버린... 하지만 영원히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남학생의 이야기. 남학생의 마음이 너무나 순수해서 죽음과의 대비가 너무 크다. 영원히 그가 진실을 알게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개인적으로 영상미가 가장 잘 그려졌던 단편.
<끝없는 밤> 역시 트릭보다는 인물의 감정에 더 눈길이 갔다. 오사카를 극도로 싫어하는 여자의 남편이 오사카에서 죽었다. 남편의 직장이 있는 곳이지만 여자는 별거를 해서라도 오사카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형사는 여자에게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오사카로 내려오게 되는데, 형사와 함께 하루동안 남편의 일상을 경험해보기로 한다. 남편이 자주 가던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또 오사카 길거리를 걸었다. 소설 내내 형사와 여자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행의 끝에서, 여자는 자신이 남편을 죽였노라 고백한다. 물론 형사는 이 모든 것을 알고서 동행을 제의한 것이지만, 그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지고 마지막 여자의 고백이 후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얀 흉기>는 솔직히 억지스럽긴 하지만, 마지막 호러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인상적이다. 두 사람간의 대화인줄 알았으나 알고보니 정신이 분열된 여자의 혼잣말이던 대화들과 현재 사건들이 번갈아가며 배치된 점도 재미있었고, 갓난아기 인형을 안고서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여자의 대사로 마무리한 지점도 좋았다. 영화였다면 개연성 떨어지는 게 더 티났을 것 같은데, 소설이어서 잘 묻어간 듯하다.
자기 전에 한 편, 일어나서 한 편씩 읽었던 게이고의 단편집. 기대를 굉장히 많이 했지만 초기작이어선지 아직은 엉성한 맛이 있었다. 게이고는 단편보단 장편이라는데, 기회가 되면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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